장르/게임

성진승보 단문

가또쇼콜라 2018. 11. 7. 16:18

2015.08.28




하얀 눈이 내리던 날, 바이올린과 기타와 플룻으로 길거리 공연을 하던 그들의 수많은 음표는 눈 위에 얼마나 많이 쌓였던가? 다른 사람들이 걸으며 생기는 사박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눈 결정이 음표와 함께 부숴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공연을 구경하는 꽤 많은 수의 인파들, 그 한가운데에 서있던 성진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가벼운 박수를 짝짝 치고는 위를 바라보며 숨을 뱉었다. 펭귄 령충 몇마리가 물 위를 부유하듯 출렁이며 도는 것이 보였지만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나와야 할 뿌연 입김은 보이지 않았다. 차사니까 당연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성진은 어쩐지 씁쓸해졌지만 그래도 지금 상태나 상황에 대해서 후회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중구 담당 차사이고 이미 죽었으니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내 공연이 끝나 사람들이 손바닥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자 성진은 그것을 기점으로 몸을 돌려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뒤에선 화답하듯 길게 떨리는 바이올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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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떠들썩했던 낮과는 반대로 중구의 밤은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밤, 산 자들은 휴식을 취하는 시간. 죽은 차사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소울폰이 조용한 걸 보면서 성진은 웬 일이지 싶었다. 사악한 령들이 뒤에서 작당하고 뭐라도 하려 하는건가,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소울폰을 집어넣고 저도 모르게 사무실 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자연스레 눈에 비친 밖의 밤하늘엔 령충들과 펭귄 령충들이 어우러져 떠들썩하게 삑삑대고 있었다. 그뿐이었으니 성진은 별 생각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귀와 뇌에 밟히는 익숙한 화음에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삑삑대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은 소리였다. 바이올린의 현이 울며 연주되는 소리, 현을 튕기듯 떨리며 나는 기타 소리, 하늘 위를 붕붕 나는 플룻 소리. 령충들은 낮의 길거리 공연을 따라하고 있었다. 펭귄 령충의 동그란 입에서 나는 소리에 일반 령충들은 춤이라도 추는 것마냥 둥실둥실 떠다니며 몇번이나 돌았고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그 모습에 성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 몸을 창 밖으로 반쯤 내밀었다. 성진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즈음 갑자기 익숙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크게 울려와 그들의 귀를 강타했다. 수많은 기계 부품들의 집합음에 령충들은 몸을 움츠렸으나 성진은 익숙하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진은 그 소리와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승보!"


엘리제는 직선을 그리며 신호등이 친절히 맞이해주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지만 이내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기꺼이 바퀴의 돌림을 멈추어 승보가 성진에게 고개를 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글을 벗은 승보는 엘리제를 조심스레 세우고 손잡이를 손끝으로 쓰다듬은 뒤에야 발을 도로 위로 내딛었다. 이를 천천히 지켜보던 성진은 승보가 완전히 서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달리지 않는 말은 죽은 말이나 다름 없단 말이지. 엘리제랑 산책 좀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길일 뿐이야."


어쩐지 승보다운 대답이 돌아와서 웃음지은 성진은 령충들을 힐끗 보았다. 움츠려있던 령충들은 언제 그러기나 했다는 듯 다시 삑삑 소리를 만들며 화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도 그들답지 않은가? 성진은 마냥 즐겁기만 한 령충들쪽을 향해 손 끝을 뻗었다. 승보의 얼굴이 뭐냐는 듯 한 얼굴로 변했다.


"그럼 좀 쉬다 가세요. 마침 길거리 연주회도 하고 있었는데요. 엘리제도 좋아할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주회라니? 여긴 령충들밖에 없잖아."


성진이 손 끝을 다시 움직이자 그제야 승보의 시선은 령충들을 향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못 알아들은 듯 승보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이내 익숙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자 승보는 팔짱을 끼고 엘리제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한쪽 발이 다른쪽 무릎 위로 올라가 까딱거렸다.


"뭐야? 쟤들이 저런 것도 할 줄 알아?"

"아까 낮에 진짜 길거리 공연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펭귄 령충들이 있었는데, 그게 재밌었나봅니다. 저렇게 따라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니요."

"들어줄만은 하지만 그래봐야 령충들이야."


승보는 올려보던 고개를 반쯤 숙였지만 자세는 그대로였고 눈까지 감았기에 아직은 떠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성진은 작게 웃었다. 질리지도 않는듯 계속 삑삑대며 연주하는 령충들의 소리를 새겨들으며 성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너머엔 다시 음표가 눈 위로 하늘하늘 쏟아지고 있었다. 그 위에 선 승보 위로, 그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