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효첨] 밤의 이야기
2015.08.28
중구의 밤은 묘하게 떠들썩한 날이 많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자들의 일일 뿐, 산 자들에겐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산 자들이 잠을 자고 각자의 꿈을 채워넣는 시간, 동시에 죽은 자들이 활동하기 제일 좋은 시간. 물론 산 자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건 그곳을 담당하던 차사들 덕이 제일 컸다.
"봐, 영파가 잡혔어. 난 북쪽으로 가볼게. 이래야, 가자!"
그 날 새벽의 임무는 쪽박귀들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바이러스 침투로 인한 데이터 오류 때문에 그만 명계의 쪽박귀들이 인간계로 전송되어 풀렸다는 것이였다. 장소는 여러곳이었지만 개중엔 중구도 있어 이동이는 어질산의 소울폰으로 연락해 임무를 내렸고 어질산은 지오와 하륜에게 임무의 내용을 전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지오였다.
"그럼 난 남서쪽으로…쿨럭, 조심해."
"네 걱정이나 해. 난 저쪽을 찾아볼테니까."
하륜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어질산은 이내 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멀어진 지오와 이래, 어질산의 뒷모습을 짧게 흩어본 하륜도 발을 멀리 뻗었다. 그들이 모였던 자리엔 이내 아무도 없게 됐다.
-
한참이나 주변을 살피며 달리던 지오는 영파의 위치가 근처에서 잡힐 즈음에야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지오는 혹시나 싶어 뒤따라오던 이래와 함께 주위를 흩어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셔터를 내린 상가 몇개와 함께 있는 빌라 뿐이였다. 담이 쌓여진 너머는 철대와 파이프들이 쌓여있는 걸 보아하니 공터에서 공사를 진행중인 것 같았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이 휑해 지오는 순간 자기가 잘못 온건가 싶어 다시 소울폰을 확인해봤지만 소울폰의 화면은 틀림없이 이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오의 어깨께에 서서 빼꼼히 소울폰을 내려다보던 이래는 고개를 들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오빠, 저쪽으로 가보자. 소리가 들려."
"소리? 무슨 소리?"
"훌쩍이는 소리. 쪽박귀가 아닐까?"
"그럼 숨어 있단 말야? 확인해보자."
이래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지오는 소울폰을 내리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태클을 걸릴 시점이었지만 지오 옆엔 즐겁게 걷는 이래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금세 이래가 가리킨 곳까지 도착했고,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모퉁이 너머로 몸을 훽 내밀자 쪽박귀가 있긴 했지만 그 뒤에 한명이 더 있었다. 예상 못했던 일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그늘 아래라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워 지오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소울폰을 꺼내들었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행동에 놀란 쪽박귀가 몸을 움츠리자 쪽박귀의 뒤에 있던 그는 재빠른 몸짓으로 앞으로 뛰쳐나와 사이를 막아 섰다. 조용한 긴장감이 정말 짧게 흐르고, 지오가 소울폰의 패드를 입력하기 직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이래가 소리쳤다.
"아, 빨간 오빠 옆에 있던 조용한 오빠!"
"뭐라고?"
갑작스러운 이래의 외침에 당황한듯 지오는 눈을 찌푸리며 여러번 깜빡이다가 간신히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제야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전체적으로 들어온 실루엣은 과연 낯익은 모습이였다.
"뭐야…나쁜 령인 줄 알았잖아. 너 효첨 맞지? 승보 팀의."
효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오의 앞에서 반쯤 비켜섰다. 그제야 쪽박귀의 모습도 지오와 이래의 제대로 눈에 비쳤는데, 쪽박귀는 무서움에 떠는 듯 했다. 비빔밥이 든 그릇을 들고.
"근데 쟤는 뭐하고 있어? 설마 훔쳐먹은 거야?"
지오가 이상하다는 듯 양 손을 허리에 걸치고 쪽박귀를 빤히 보자 움츠려있던 쪽박귀는 깜짝 놀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겁먹어 아무 말도 못하는 쪽박귀를 보는 지오의 눈에 신뢰성 없다는 빛이 돌기 시작하자 효첨은 다시 팔을 뻗어 그들 사이를 막았다.
"…배고프다고 해서 내가 요리해줬다."
"요리? 그럼 저걸 너가 만들어줬단 말야?"
고개를 끄덕이는 효첨에게 잠시 시선을 둔 지오는 상관 없겠지, 라고 말하며 이내 소울폰을 꺼냈다. 쪽박귀가 다시 흠칫 놀라며 움츠러들자 효첨은 미세하게 미간 사이를 좁히고는 허리를 조금 숙여 쪽박귀의 머리를 짧게 쓰다듬은 뒤 완전히 지오의 앞을 막아섰다. 전송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보이는게 전부 효첨 뿐이라 조금 당황한 지오는 고개를 올려 효첨에게 눈을 마주했다. 나온 말소리가 약간 높아져있었다.
"뭐야? 쪽박귀를 다시 명계로 보내야 해. 임무란 말야."
"…조금만."
"어?"
"조금만 기다려라."
"대체 무슨 소리야?"
지오가 한쪽 다리로 삐딱하게 섰지만 효첨은 그저 엄지로 가리킬 뿐이었다. 지오가 고개를 돌려 손가락 끝이 닿은 곳으로 눈을 돌리자 도달한 곳은 쪽박귀가 들고 있는 그릇 안이였다. 비빔밥이 반쯤 남은 그릇을 떨며 가만 안고만 있던 쪽박귀는 연신 눈치를 보듯 지오와 효첨과 이래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두었다 하고 있었다. 이래의 눈이 반짝였다.
"다 먹을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거야?"
"…배고프다고 했다."
"오빠, 내가 먹여줄래. 그래도 돼?"
"어, 어?"
지오가 대답하기도 전 이래는 웃으며 쪽박귀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착하지, 라고 계속 말하는 모습이 어쩐지 즐거워보여 지오는 저도 모르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작게 하하 웃었다가 이내 효첨도 있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그쪽을 보았다. 효첨은 언제나처럼의 무표정으로 쪽박귀와 이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이정도라면 괜찮을거라 생각하며 제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어지럽힌 지오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중구 담당은 우리잖아. 너흰 담당 구역이 없지 않아?"
"……."
"뭐라고?"
"……."
"뭐야, 대답하기 싫다고 말을 하던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말을 무시하니 더 기분 나빠서 지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효첨은 그저 속 깊은 눈으로 지오를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울컥할즈음 갑자기 들려온 소울폰의 벨소리에 지오는 허리에 걸쳤던 팔에 힘을 주었다가 내리고는 소울폰을 들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지오야, 쿨럭. 어디야?]
"…어? 아, 너흰 벌써 만난 거야?"
[멍청아! 어디서 뭐하고 있길래 아직도 안 와!]
갑자기 끼어든 어질산의 큰 소리에 지오는 별 생각 없이 시간을 확인해봤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벌써 이만큼 지난 시간이라니, 얼마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또 딴짓하지 말고 빨리 오지 못해!]
"알았어! 금방 갈게!"
다시 들려온 소리침에 저도 모르게 소울폰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잡은 지오는 황급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효첨의 뒤로 돌아가자 어느새 훌쩍임을 멈추고 행복한 얼굴로 입 안의 것을 우물거리고 있는 쪽박귀와 잘했다고 말하는 이래가 있었다.
"가야 해, 이래야!"
"응?"
소울폰의 상태를 전송모드로 바꾸자 효첨을 저도 모르게 힐끗 본 지오는 이내 효첨이 말없이 이쪽을 보고만 있다는 걸 깨닫고는 소울폰을 쪽박귀에게로 향했다. 입 밖으로 단어를 꺼내자 동시에 쪽박귀의 형태가 데이터화 되며 소울폰 안으로 들어갔고 지오는 이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야, 너 나중에 봐! 그때는 말로 해라, 어!"
이내 달려가기 시작한 둘조차도 말없이 보고만 있던 효첨은 시끄러운 소리와 모습이 사라질 때 즈음 자기도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 얘기 했는데, 라는 생각은 이미 저 너머로 보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