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라이] 바다눈
2015.09.24
어느 순간부터 제트는 잠에 들 때마다 꿈을 꾸고 있었다. 쉐도우 라인의 주민은 꿈을 꾸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어둠의 정점인 그는 꿈을 꾸곤 했다. 꿈의 내용은 매일 달랐고 오늘 또한 그랬지만 그날따라의 꿈은 유독 특징적이였기에, 곧 꿈에서 깰 제트는.
제트는 미간을 좁혔다.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 홀로 있는 것은 예전의 현실과도 같았지만 좀 더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인지, 가슴을 비롯한 온 몸에 압박감과 답답함이 느껴져 제트는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물거품이었다.
물거품? 제트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뻗은 손은 느릿하게 휘저어져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도 같았다. 발을 뻗어 걷고 나서야 이상하게도, 본능적으로 이곳은 물 속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제트는 자조할 뿐이였다. 꿈에서조차도 곁에 있는 건 어둠 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지. 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에서 찾을 수 있는 빛은 아마 누군가가 단 동그랗고 작은 불빛 뿐일 것이었다. 제트를 삼켜버릴 아귀, 하지만 제트는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꿈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나아가보기로 했다. 무겁게 움직이는 몸은 제트에게 화를 나게 할법도 했지만 꾹꾹 눌러참으며 제트는 힘겹게 걸어나갔다. 어딜 봐도 어둠밖에 없었기에 발 끝에 닿는 감각만이 땅을 딛고 있구나 싶을 뿐이었다. 손을 앞으로 해 몇 번 물을 휘저은 제트는 여전히 빛이 없는 심해임을 상기하며 다시 걸어나갔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제트는 웃지 않았다. 제 발자국 소리도 물에 먹혀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적막, 이건 역시 예전의 어둠과도.
그 때 눈에 띈 것은 흰 것이었다. 하얗고 작은 덩어리. 부스러져가는 조각은 나풀거리며 제트의 바로 눈 앞에서 떨어져내렸다.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은 흰 것을 따라 숙여졌다. 이내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것이 위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제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수많은 것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까만 바다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레이스 조각같기도 식물 같기도 했다.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게 흔들리는 하얀 것들은 마치 빛처럼 반짝이며 제트의 주위에, 그 너머에 내리고 있었다. 바다 안에도 눈이 내렸던가. 어차피 꿈이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제트는 팔을 휘둘러 조각을 잡아챘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는 위태로울 정도로 흔들리며 빛나는 하얀 덩어리가 있었다. 이게 눈이 맞나? 제트는 다시 주먹을 쥐어 그것을 손 안에 가뒀다.
바다눈. 해설이라고도 한다. 바다의 표층에는 식물성 또는 동물성 플랑크톤이 있는데,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움직이거나 부력을 조절해 가면서 이동한다. 그러나 플랑크톤이 죽으면 그 유체는 분해되거나 조그만 덩어리가 되어 해저로 가라앉는다.
제트가 이변을 느낀 것은 반짝이는 것들 덕이었다. 어둠 속의 그림자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빛 뒤의 그림자는 누구라도 쉽게 알아채고 말듯, 제트의 위에 그림자가 졌기에 제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만큼 고개도 쉽게 올라갔고 제트는 보고 만 것이었다. 반짝임 사이의 그림자. 사람의 뒷모습. 또 본능적으로 알았다. 라이토라고.
그러나 플랑크톤이 죽으면 그 유체는 분해되거나 조그만 덩어리가 되어 해저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내려오고 있는 것은 시체였다. 그 순간 제트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심장이 덜컹한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였다. 잠깐만, 꿈이였던가. 하지만 왜. 제트는 황급히 부력을 받아 천천히 떨어지는 라이토를 받아들고는 모습을 확인했다.
나풀거리는 살점이 있었다. 어쩌면 뼈라고 하는게 더 정확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습을 이미 탈피한 것은 그렇게 라이토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였다. 뭔가 말이 나올법도 했지만 제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뼈를 받아들고 있는 손만이 떨렸다. 한참 후 입이 뻐끔거리는 순간 쏟아져나온 것은 말 대신 물거품이었다.
깨어난 것은 직후였다. 휩싼 것은 두려움이었다. 반짝임을 갈구하던, 재미있어하던, 그래서 갖고자 했던 제트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우습게도 스스로는 그렇게 느꼈다. 물론 이번에도 제트는 웃지 않았다.
"라이토."
라이토. 라이토. 라이토. 라이토. 라이토. 끊임없이 이름을 되새기며 제트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선 자기 자신대신 라이토가 제트를 마주하고 있었다. 결의를 다지듯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꾹 쥔채로. 그래, 꿈이지. 꿈은 꿈이지. 꿈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 제트는 문득 이는 분노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두려움에 팔을 뒤로 당겼다가 쏟듯이 쾅 쳐내렸다. 거울이 사정없이 부서져내렸지만 그 사이로도 라이토는 비치고 있었다. 미러볼의 빛이 유리 조각들에 비치며 빛나 꿈에서 본 것처럼 반짝였다. 차이점이라면 단 하나, 유리 조각은 하늘에서 떨어져내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체와 함께.
"라이토."
하지만 안도가 되지 않는 건 어째서였는가.
"널 완전히 먹어버리진 않을거야."
꿈과는 달리 라이토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음에도 거울을 깨버린 건.
"넌 언제까지나 나와 있을 거다. 내가 갈구하는 만큼. 어둠 속에서, 영원히."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영원히."
저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영원히."
불확신. 어둠의 황제는 어째서 빛을 가져서야 어둠에 사로잡히고 만 것인가. 하지만 그것을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트의 입술이 달싹일 때 나온 것은 숨소리 뿐이였다.
제트는 제 얼굴을 덮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감은 눈으로 보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제트는 눈을 감고 시선을 똑바로 두고 있다가 이마를 깨어진 유리 위에 댔다. 차가움과 따가움. 노란 빛으로 반짝이는 것마냥 느껴지는, 이마에 유리조각이 박히는 충격. 문득 제트는 제 주위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