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게임
[상일은창] 남긴 것
가또쇼콜라
2018. 11. 8. 01:28
※회색도시 2 약스포일러 주의
상일이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가을이 되어야 볼 수 있는 단풍잎 같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세차게 열을 내어 모두 태워버리는 장작 위의 불꽃같기도 했다. 노을 진 하늘 끝에 점점이 먹히다 흐릿하게 남은 푸른빛에까지 시선이 닿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핸들을 꽉 쥐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상일은 시선을 내렸다. 차창 밖에는 엔진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발걸음 소리 등 온갖 것들이 가득했지만 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정확히는 언젠가부터 조용해졌던 거지.’
옆의 조수석으로 눈을 돌리니 팔짱을 낀 채로 상체를 잔뜩 웅크려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은창을 볼 수 있었다. 참 불편하게도 잔다고 상일은 세 번째로 생각했다.
성식이 시킨 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실수는 없었으며 사건 또한 없었다. 촬영장에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사건이 없었던 이유는 쓸데없이 거미줄을 자르지 않고 처음부터 거미를 노리는 것과 같았다. 정말로 별 일이 아니었지만 상일은 가슴 속에서 자라는 혐오로 심장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내가 운전할게. 넌 앉아 있어.”
답지 않은 제안을 한 것은.
“뭐야. 무슨 날이야?”
당연하게도 운전석에 타려던 은창은 그 말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상일을 보았다. 그런 것도 할 줄 아냐는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상일은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반대쪽 문으로 향했다.
“기분전환이야, 기분전환. 그리고 그렇게 놀라면 나 상처받아.”
상일이 운전석 쪽의 앞에까지 도달해서야 은창은 화들짝 문을 막고 있던 몸을 움직여 피해주었다. 자신의 뒤통수부터 목까지를 천천히 쓰다듬어 내리는 것이 딱 봐도 멋쩍음을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상처가 다 얼어 죽었다.”
그러곤 두 박자 늦게 조수석에 타고 대답하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왜 웃어?”
상일은 대답하지 않고 한 번 더 웃었다. 오른손을 내밀자 투덜거리던 은창은 마지못해 차키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기가 차다는 듯 바람소리를 내는 은창을 향해 이번엔 다른 의미로 빙그레 웃어준 상일은 시동을 걸었다. 악셀을 밟자 차창 너머에 멈춰있던 도시의 풍경이 흐릿하고 빠르게 뒤로 멀어져갔다.
달려 나가던 차만큼이나 빠르게 흐르던 시간 속에는 몇 마디의 시답잖은 대화가 있었다. 핵심은 전부 피하고 바람처럼 가볍게 겉만 스치는 말들을 나눈 이후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대화가 끊긴 그때 즈음부터 잠든 모양이라고 판단한 상일은 다시금 은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는 꽤나 위태로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잠든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했나.’
굳이 지금 깨울 필요는 없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라는 조언 정도야 해 줄 수 있었겠지만,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애매하게 깨우면 안 될 것 같아 그만뒀다. 상일은 은창에게 다른 무언가를 하는 대신 차의 속도를 조금 줄이기로 했다. 널널하게 도착한다고 해서 손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산한 도로를 지날 때 즈음 상일은 목소리를 들었다.
“…윽….”
잔뜩 억눌린 소리였다. 상일은 그런 것들이 어느 때에 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정은창?”
돌아보자 은창의 자세는 더 위태로워 보였다. 잔뜩 수축한 팔과 등이 떨리고 있었다. 다시금 목소리가 힘겹게 빠져나왔다.
“미…안해. 미안…….”
가위라도 눌린 건가 싶어진 상일은 지나가려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식은땀이 은창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으, 은서…….”
“정은창.”
“미아……컥.”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막혔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은창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기겁한 상일은 황급히 제 안전벨트를 풀고 팔을 뻗어 은창의 손을 꽉 쥐었다.
“정은창! 정은창, 일어나!”
맞닿은 피부 너머에선 정말로 사람 하나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악력이 느껴졌다. 어두운 불안감이 상일의 등에서 가시를 뻗었다. 이러다가 정말 큰 일 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은창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색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일어나라고!”
상일은 이를 악문 채로 은창의 어깨를 잡고 팔에 힘을 주어 당겼지만 손은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요지부동이었다.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에 기침이 섞였다.
“정은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빠르게 자각하고 나니, 내용이 인식될만한 생각을 하기도 전에 상일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든 깨워야 했으니까. 그게 설령 폭력의 형태를 취하게 되더라도. 사과는 산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차안에 뺨을 강타하는 소리가 깔끔하게 울렸다.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등을 잠식했던 불안감이 심장 박동 사이사이에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상일은 피부 안의 따끔거림을 느끼며 은창의 양 어깨를 꽉 쥐고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하고나서야 수축된 근육이 조금씩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카롭게 각 져있던 은창의 손가락 마디가 점점 호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상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목에서 완전히 떼어냈다. 맥없이 풀린 손이 허벅지 위로 떨어지자 상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창은 격렬하게 마른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상체가 바로 수그러드는 모양을 보며 상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등을 두드려주었다. 물론 은창은 신경 쓸 정신조차 없어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손을 쳐내든가 자신한테 신경 쓰지 말라는 둥의 확연한 거부반응을 보였으리라. 상일은 다행인 일인지 동정을 해야 하는 일인지 답을 낼 수 없었다. 그저 은창의 기침이 조금 잦아들자 옆에 있던 물병을 집어 건네줄 뿐이었다.
받아 든 손은 시간이 꽤 지나서야 움직였다. 척 보기에도 조금 뻣뻣하게 뚜껑을 따는 동작이 평정심을 잃은 상태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뒷면을 의도치 않게 본 상일 또한 혼란하기는 매한가지여서, 둘 사이엔 침묵만이 남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걸러낸 것 중에서 고르고 또 골라도 해줄 수 있을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이곳에서의 지나친 가까움은 독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 사이에 은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못 본 걸로 해.”
상일은 벙찐 상태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놓고 스스로 놀라버렸다. 어차피 곧 헤어지게 될 사람이었고 헤어져야만 했다. 가까워져봐야 하등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일은 이어서 묻고 말았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왜 그랬어?”
라고.
배드민턴이라도 치는 것 마냥, 이번엔 은창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그 사이에 상일은 시동을 걸어둘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거센 바람으로 구름이 슬슬 한 발짝씩 움직일 무렵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다들 그런 거 있잖아. 그냥 그런 거야.”
딱 봐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상일은 더 캐어 물을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선명히 그어진 선 안에 더 들어설 용기가 없었다. 어차피 곧 헤어지게 될 사람이었고 헤어져야만 했다. 상일은 자신이 정말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더 물으면 자신이 뭘 어쩔 수 있는가.
“쓸데없이 물어봤네, 미안해. 지금은 괜찮지?”
“그래.”
이번엔 곧바로 대답이 들려와서 조금 안도했다. 상일은 은창을 곁눈질하곤 시동을 걸었다.
“다시 출발하자.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다.”
하늘은 어느새 어두운 청보라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늦는다면 한 소리 정도는 들을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작게 은창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두 번 사과 안 한다….”
이내 엔진의 굉음과 차체의 흔들림에 먹혀 부드럽게 사라졌지만.
* * *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은창은 막 손에 쥐여진 민트블루색의 작은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줄기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작은 초록색 잎들이 그림자 진 태양빛을 받고도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은창의 머릿속에 300가지를 넘는 생각이 동시에 휘몰아쳤지만 정작 입으로 나온 말은 간단했다.
“난 심부름 같은 거 안 한다.”
상일이 뜬금없이 제게 이런 걸 줄 리는 없다는 전제를 깔자 나온 결과 중 하나였다. 설마 김성식에게 갖다 주라고 하려는 걸까 싶어져 화분을 되돌려주려던 찰나였다.
“심부름이라니 말이 심하네. 정은창, 너한테 주는 거야.”
참으로 어이없는 소리였다. 은창은 진흙처럼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지던 침묵이 뒷목을 간질일 때 즈음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왜 나한테 주는데?”
“분위기 환기…에 좋다더라고. 숙소에 두는 건 어때?”
말하는 게 조금 어색해 보였으나 위화감이나 악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저의를 가늠해보듯 한동안 상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창은 고개를 천천히 떨어트렸다. 틀린 가능성을 하나씩 배제해본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창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묻자고 한 일을 제 손으로 다시 꺼내는 것이 싫었다.
“고맙다.”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비록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테지만, 이 사람에게 진실 된 것을 주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던 은창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나는 식물 키우는 거 처음이거든? 죽어도 뭐라고 하지 마라.”
상일은 먼저 터져버린 웃음으로 하려던 대답을 대신했다. 퉁명스러움과 미소의 중간 얼굴을 한 은창은 상일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잎이 바람을 따라 살랑일 때마다 마음 한 구석 또한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은서 생각이 나서였는지, 죄책감에 비롯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둘 다 아니라면…
은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식물이냐?”
* * *
“수염패랭이꽃?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숨겨둔 사람 있냐?”
“헛소리 할 거면 저리 가라….”
“농담도 모르냐. 재미없기는.”
은창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종이컵을 꺼내면서도 상체를 숙이고 화분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정재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숙소로 가기 전 잠깐 들른 휴게실에 정재가 앉아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감시와 비슷한 개념의 시선을 느끼던 정재는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 내가 막 건드릴까봐?”
“선물 받은 거라고 했잖아.”
“깡패라고 예의까지 없겠냐? 필요할 땐 잘 챙겨!”
“어련하시겠냐.”
이어지는 정재의 반응을 무시한 은창은 따라낸 물을 그대로 들이키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갑자기 뭐야?”
질린 표정을 지은 정재에게 은창의 시선이 한 번 갔다. 이내 정수기와 화분을 차례로 쳐다본 눈동자는 다시 정재에게 향했다.
“물. 유상일이 과연 줬을까?”
정재는 한동안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유상일이 준 거였냐? 왜?”
은창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정도는 누가 들어도 타격 없을만한 말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숨길 부분만 확실히 하면 괜찮으리라.
“일이 좀 있었어.”
예상대로 정재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은창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정이나 주지 마라.”
은창은 테이블로 성큼 다가가 마시려던 물을 화분에 조금 뿌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건 예의상 해주는 반응이건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몰랐으면 여기까지 왔겠어?"
“어쨌든 사냥개라 이거냐?”
박하사탕을 집은 듯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창은 대답 없이 종이컵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쓰레기통에 던졌다.
* * *
은창은 제법 키우기 쉬운 식물일 거라는 말이 진짜임을 시간이 꽤 지나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식물을 처음 키워보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햇빛 잘 쬐여주고 말라 죽게만 하지 말라는 말밖에 못 들었는데도 그랬다.
“안 그래보였는데 명줄이 질기네….”
이파리를 검지 끝으로 조심스럽게 톡 건드리자 끝이 싱그럽게 살랑댔다. 끽해야 손바닥만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창은 기묘하게도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잠깐의 평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은창은 손가락으로나마 꼭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양지에 사는 사람들처럼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한순간의 착각을. 비록 그 뒤에 놓인 것이 복수심과 죄책감, 자기혐오뿐이더라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즈음 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은창은 저도 모르게 화분을 숨기려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누구세요.”
“정은창, 있어? 나야. 유상일.”
상당히 의외인 인물이었기에 잠깐 동작이 멈췄지만 이내 매끄럽게 흘러가 문을 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한명이 더 있었다.
“야, 정은창! 반갑다!”
“뭐야? 최재석? 왜 둘이….”
기운차게 함박웃음을 지은 재석은 상일을 보았다. 상일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화분을 선물해줬다, 잘 살아있을까 같은 얘기를 하게 돼서…생각난 김에 가볼까, 로 결론이 나왔지. 그런데 혼자 찾아가면 좀 그럴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 최재석이가 같이 가준다고 했지!”
“따라온 거잖아.”
“가준 거거든?”
“화분 잘 살아 있으니까 둘 다 그냥 가라….”
자신의 공간에 누군가 들어온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은창은 어쩐지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쫓아내려 했지만 재석이 먼저 문 사이에 발을 끼워 넣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빼긴 뭘 빼! 빼빼로라도 되냐? 인사 안 해줘? 어서 들어오세요, 해도 모자를 판국에!”
“네 눈엔 여기가 가게로 보이냐? 폐업한지 오래니까 빨리 가!”
앞이 막힌 슬리퍼를 신은 발로 요지부동인 재석을 툭툭 찰 즈음이었다. 가만 보고 있던 상일이 문 옆을 잡았다.
“금방 돌아갈게. 그러니까, 응? 안 들어가도 되니까.”
건장한 성인 남성 하나도 모자라 둘이 문을 당기기 시작하자 은창에게 분명 손잡이가 먼저 망가지리란 확신이 들었다. 이래나 저래나 사소한 일로 골머리를 더 앓긴 싫었기 때문에, 결국 은창이 먼저 손을 놓았다.
“진짜 누가 깡패들 아니랄까봐…거기 있어봐.”
완전히 삐죽해진 얼굴이었지만 재석과 상일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은창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이건가, 같은 생각을 하며 양손으로 조심스레 화분을 들고 왔다.
“자, 봐. 멀쩡하잖아.”
움직임이 전해져서 그렇겠지만 식물은 마치 즐겁다는 듯 살랑대고 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 윤기 넘치는 초록빛을 자세히 살펴보던 상일이 웃으며 은창을 올려다보았다.
“정은창…죽여도 뭐라 하지 말라더니 은근히 신경썼나보다?”
“키우기 쉬운 걸로 준 게 누군데? 자꾸 속 긁지 마라….”
“거, 사람이 솔직하지를 못 하네!”
“넌 그냥 조용히 해.”
재석까지 껴서 쌍으로 말이 들어오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식물을 만질 때만 잠깐 느끼던 착각이 생각나 은창은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밖으로 나오는 건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그럼 내가 속 긁을까? 막 이래. 풉…큭….”
혼자 터진 상일을 기점으로 가벼운 헛소리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은창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적당히 한 두 마디 정도는 받아쳐주었다. 그러면서도 방이 이토록 떠들썩했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떠오르지 않았다.
* * *
“아, 잠깐 있겠다고 해놓고 오래 있었네. 이제 가볼게.”
이야기를 먼저 끝낸 건 상일이었다. 머리가 생각으로 꽉 찬 은창이 한숨을 쉬었다.
“저녁이잖아…. 빨리 가.”
“걱정 고맙다, 정은창! 외로우면, 어? 얘기해라?”
“전화하면 받아는 줄게.”
“……하겠냐? 둘 다 잘 가라.”
손을 흔들고는 떠나가는 상일과 재석의 뒷모습을 보던 은창은 문을 닫았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착각조차 떠나고 현실만이 남았다.
은창은 모든 것이 잿빛으로 물든 공간 속에서 화분을 꽉 안은 채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가슴 속에 매몰된 것들이 파랑을 타고 밀려왔다. 뒤엉켜 엉망이 된 감정들 한가운데에서 은창은 저도 모르게 상일을 생각했으나 곧 잔해에 깔린 은서의 손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