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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9
※스포주의
※동인설정 조금 포함되어있음
배터에게 와 닿는 우울한 눈빛이 있었다. 끊어져버린 플레이어와의 연결고리. 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껐을 때 배터는 죽은 듯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배터의 행동거지는 모두 플레이어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있었다. 서있기만 했다.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배터에게 와 닿는 우울한 눈빛이 있었다. 배터는 제게 느껴지는 시선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간 끝엔 낯익은 고양이 가면을 쓴 쟈크리가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고 배터는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의 쟈크리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노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우울한 눈빛이 배터에게 오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배터는 먼저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가만히 쟈크리를 쳐다보았고 쟈크리 또한 여전히 우울한 눈빛으로 배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천천히 천장에서부터 타고 내려온 적막이 그들의 주위를 온전히 덮었을 무렵 먼저 입을 연 것은 쟈크리였다.
“배터, 후회하지 않아?”
쟈크리는 배터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쟈크리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조심스레 세워 배터의 눈가를 점점이 쓸었다. 배터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움찔했다. 동시에 눈 위에 있던 눈 또한. 그 순간 흠칫하는 배터의 몸이 있었지만 쟈크리는 그걸 못 본 척 하고 눈가를 쓸던 손가락을 볼을 타고 흐르게 하듯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손가락이 다다른 정착 역은 입 꼬리였다. 애매한 곳. 고개는 움직여지면서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저 편할 대로의 부조리에, 배터는 당장 손 떼라는 말 대신으로 고개를 저어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 그럼에도 쟈크리의 손이 떨어지지 않자 배터는 평소처럼 알파를 부르려 했지만 플레이어도 없는 상황에선 제가 어찌할 길이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아 그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곤 평소의 무표정으로, 마찬가지로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후회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넌 끝까지 그렇게 말할 셈이군.”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정화자인 내가.”
그 말에 쟈크리는 대답하지 않고 배터의 입 꼬리에 닿아 있던 손을 떼서 배터의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모자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눈을 볼 수 있었다. 본디 흰색이 있어야 할 곳이 검은색으로 채워져 밝은 붉은빛 홍채를 어둡게 빛내며 동공이 있는 중심으로 갈수록 검붉은 빛으로 가라앉고 있는 네 개의 눈.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쟈크리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쟈크리가 모자를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떼자 네 개의 눈은 다시 모자의 검은 그림자 속으로 가려졌다.
그리고 다시 한참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배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플레이어 같으니. 쟈크리가 그렇게 생각할 찰나 순간 쟈크리에게 와 닿은 날카로운 눈빛이 있었다.
“날 막고 싶은 건가, 두꺼비 왕의 토벌자?”
하지만 쟈크리는 고개를 갸웃한 채로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그 행동의 뒤에는 곧바로 끄덕임이 따라왔다.
“그래.”
그러자 배터의 시선은 자신의 배트가 있을 자리로 향했다. 플레이어가 있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바로 배트를 들고 휘두르기라도 할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플레이어는 아직도 배터와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배터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하, 하고 평소처럼 웃은 쟈크리는 배터의 왼쪽 어깨 위에 손을 가볍게 얹어 검지로 동그라미를 세 번 그려보였다. 그 동그라미가 뜻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알파, 엡실론, 오메가.
“토벌자라, 그 얘기도 맞는 얘기야. 하지만 난 전통적인 모든 비디오 게임에서 등장하는 상인일뿐이야. 게다가 널 막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무슨 뜻이냐는 듯 배터의 시선이 쟈크리가 보이고 있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향했다. 쟈크리는 연극적 과장이라도 하듯 잠시 동안 숨을 멈춰 정적을 유지했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곁에 내가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는데 말이야. 정화라는 이름의 임무가 온 몸에 꽉 찬 정화자의 곁엔.”
“언제는 네가 내 곁에 끼어있었던 적이라도 있었던 것 마냥 얘기하는군.”
“네가 물건을 살 때 언제나 곁에 있었지.”
“농담은 그만둬.”
쟈크리는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다가 시선을 위로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으로 올라갔던 시선이 내려와 배터를 향하자 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는 그제야 접속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쟈크리가 재빨리 말했다.
“조만간 또 보게 되겠지.”
내 주위에 있는 세이브 박스는 매력적인 존재잖아. 농담처럼 건넨 말의 대답은 전혀 들려오지 않아 쟈크리는 또 웃었다. 배터는 그 웃음소릴 들으며 어쩌면 습관적인 웃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쟈크리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사라지자마자 익숙한 감각이 배터의 온 몸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플레이어에 의해, 자신의 자유 의지 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여지는 감각. 배터는 이 감각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배터는 다시 한 번 되뇌였다. 이제 배터는 익숙한 문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여왕이 보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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