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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은 암막 커튼이 내려진 세상 위에 부숴진 채로 떨어져내리고, 바람은 살랑이며 촛불을 가볍게 흔들고 갔다. 그런 밤이었다. 달은 없었으나 광원이 있다면 책을 못 읽을 것도 없었기에 쵸지는 잔잔한 밤의 공기를 간간히 종이 넘기는 소리로 쪼개고 있었다.
최초의 이변은 소리였다.
"쵸지! 나 왔어!"
방 문을 드륵 여는 소리는 목소리보다도 작았으나 역광 속의 인영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밀고 있던 손을 거둬냈다. 고개를 돌린 쵸지가 잠시 시야를 정리하느라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온전히 떠보면 앞에는 코헤이타가 있었다. 지나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세세한 형태는 안타깝게도 익숙하지 못했다. 쵸지가 중얼거렸다.
"…코헤이타, 머리가."
머리카락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 잔뜩 엉킨 실뭉치의 모습이었다. 나뭇잎과 작은 나뭇가지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장식이라도 되는 것 마냥 간간히 꽂혀있는 것에 쵸지는 제일 유력한 것을 떠올렸다.
"아! 단련 중에 말이야, 커브를 못 돌아서 나무에 그대로 박아버렸어!"
6년쯤 같이 지냈으면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나 세상엔 말로 들어야만 하는 것들도 많으므로, 쵸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정을 확신시켰다. 그와 동시에 책을 내려놓으면 종이뭉치와 책상의 표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대답 대신으로 해서 고개를 끄덕인 쵸지는 천천히 일어섰다.
"중얼."
"응? 뭐라고?"
상체를 살짝 옆으로 틀어 귀 뒤에 손을 대는 코헤이타에게 가까이 다가간 쵸지는 무언가를 품 속에서 주섬 꺼내들었다. 쵸지의 얼굴을 향해있던 눈동자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빗겨줄까."
대나무로 만든 빗이었다. 어째서 그런게 품 속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이 코헤이타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별로 상관 없잖아."
쵸지는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더 할 필요가 없는 말은 머릿속에 남겨두는 과정이었다.
"그대로 자면 내일 다시 머리 묶기 힘들거야."
그래서 작게 연 입에서 나온 내용은 그 정도였다. 언제나처럼의 작은 목소리였으나 둘 사이가 가까웠고 주변이 고요한 덕에 이번에 코헤이타는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쵸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럼 부탁할까!"
코헤이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닥에 앉으면 요란하게 털썩 하는 소리가 났다. 반응하듯 촛불이 흔들렸으나 꺼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무엇보다도 다른 방의 친구들이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 제일 컸다.
쵸지는 코헤이타의 두건과 머리끈을 풀어내리고 청회색의 머리 뭉치 아래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가볍게 털어내자 머리카락 사이사이의 압력만으로 제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몇 나뭇잎은 그대로 팔랑팔랑 바닥에 떨어졌다. 쵸지는 심하다고 생각했으나 말로 하진 않았다. 다만 확실히 꽂혀있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전부 빼내는 작업부터 실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코헤이타는 무언가를 조금씩 얘기했다. 오늘 있었던 일과 트레이닝 중에 벌어진 일, 자신이 느꼈던 것 등. 전부 쵸지가 함께하지 않았던 순간들의 일들이었다.
"ㅡ그래서! 그대로 이사쿠가 오리 머리를 뒤집어쓰게 됐단 말이지. 토메사부로랑 몬지로가 더 당황해하더라고. 뭐, 항상 있는 일이지?"
"…그렇네."
마지막 나뭇잎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쵸지는 그제야 빗을 들었다. 손이 자꾸만 머리카락의 중간쯤에서 멈췄지만 결국엔 코헤이타의 엄살과 함께 끝까지 떨어져내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단단한 빗살에 표면이 얽힌 채로 스쳐지나가는, 부드럽게 사라락 하는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쵸지는 그 과정에서 우수수 떨어진 머리카락 뭉치를 무시하기로 했다. 별로 탈모를 걱정할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코헤이타는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숱이 더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엄청 아팠다구! 사정을 좀 봐 줘."
"엄살이잖아."
"쵸지, 너무해!"
"조용히."
짧은 일갈 이후로는 정말 고요 뿐이었다. 두피 위에 가볍게 얹은 빗살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육체의 미동이 쵸지의 손으로 전해졌다. 시선을 잠깐 문 밖으로 돌리면 다른 방의 방향에서 보이던 불빛의 흔적이 어느새부터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건지에 대해 가늠하던 쵸지는 어느새 기울어지고 있는 코헤이타의 몸을 재빨리 잡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잠깐 손이 멈춰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코헤이타, 졸린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쵸지가 가늠하기엔 이렇게나 늦은 새벽이었고, 코헤이타는 일상생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을 못 견뎌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타인의 손길을 받는다는 건 제일 위험한 일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안정되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굳이 말하자면 모든 근육의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리라고 쵸지는 생각했다. 작은 웃음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역시 엄살이었군.'
정작 진짜로 아픈 것은 참으면서 엄살만큼은 많다니, 정말 알기 쉬우면서도 알 수 없는 동실인 것이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코헤이타를 자신의 어깨께에 기대게 해서, 머리 정리까지 대강 끝낸 쵸지는 빗을 내려두고 그대로 육신을 안아 올렸다. 언제나처럼의 그 무게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바닥에 적당히 정리해둔 머리카락 뭉치들이 신경쓰일 법도 했지만 사실 괜찮았다. 이부자리까지는 몇 걸음이 걸리지 않으니 그 동안은 자신 또한 온기를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온하며 잔잔한 시냇물같은 생각의 흐름들이 쵸지의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단단한 바닥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걸으면서 쵸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자라…, 코헤이타."
참으로 따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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